결정적 장면은 그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좌우하죠. 그리고 이건 그냥 재밌게 본 영화와 어떤식으로든 기억하고 싶은 영화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시얼샤 로넌이라는 이름을 그녀가 출연한 영화의 결정적 장면들을 통해 외운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분께는 시얼샤 로넌이라는 이름이 낯설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께도 그럴 수 있죠. 그렇다면 이번에도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혹시 이 영화들을 아시나요? 

어톤먼트(2008), 러블리 본즈(2010),

한나(2011),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러빙 빈센트(2017), 레이디 버드(2018),

작은 아씨들(2020) 

이 중 본 영화가 있으실 수도 있고, 없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 영화가 있다면 반드시 이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시얼샤 로넌이 여기 나왔다고…?' 앞서 언급한 영화들은 모두 그녀가 비중있는 조연이거나 주연으로 활약한 영화들입니다. 그리고 저 영화들의 결정적 장면들마다 그녀가 있죠. 스크린 속에서 시얼샤 로넌의 눈동자가 빛나는 모든 순간, 그녀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영화가 알려주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가진 인물이 돼 영화를 채웁니다. 

시얼샤 로넌은 아직 아카데미에서 수상한 적도, 세계 역대 흥행 영화 순위에 오를만한 영화에 출연한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의 이름이 꽤 믿음직한 보증 수표라는 점입니다.

앞서 언급한 영화 중 재밌게 보신 게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다음 번에는 그 영화의 감독이 만든 영화에 시얼샤 로넌이라는 이름이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그렇다면 그 영화도 높은 확률로 좋아하게 되실 겁니다. 물론 이렇게 골랐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별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나오는 장면만큼은 무조건 훌륭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보증 수표란 그런 것이니까요. 

<레이디 버드>는 규정된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지어준 10대 소녀 크리스틴의 성장기를 다룬 영화예요. 엄마와 말다툼을 하다 화가 나자 달리는 차에서 냅다 뛰어내려 팔이 부러지기도 하고, '네가 더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는 엄마에게 "이게 내 베스트 버전이면 어떡해?"라고 묻기도 하죠.

한없이 당찼다가 또 한없이 여려지는 성장기를 거치며 '레이디 버드', 아니 크리스틴은 점차 스스로를 이해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운명의 상대라고 느꼈던 남자가 사실은 나를 조금도 존중해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직후 연을 끊기도 하고, 교내 인기 스타와 친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거짓으로 포장하는 일도 그만둡니다. 홀로 서서 뚜벅뚜벅 나만의 길을 걷는 방법을 깨우치죠. 시얼샤 로넌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 캐릭터를 살아 움직이게 했을까, 도무지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예요.

<작은 아씨들>은 네 자매에게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로, 시얼샤 로넌은 둘째 '조'를 연기했습니다. 여성이 독립적인 주체로 살기 어려웠던 1860년대에 "자유로운 독신이 되어 스스로 내 배의 노를 젓겠어."라고 말하는 주체적인 여성이죠. 많은 명대사 중, "여자도 생각이 있어요. 외모만 중요한 게 아니라 야심과 재능도 있다구요. 사람들이 여자에게 사랑만이 전부라고 말하는 건 아주 지긋지긋해요!"라고 외치는 장면에서는 속이 다 시원해서 극장 매점에서 산 사이다를 마실 필요가 없었죠. 온 마음을 쏟아내며 말하는 시얼샤 로넌의 모습은 '조' 그 자체였어요.

시얼샤 로넌의 필모그래피가 궁금해져 '도장깨기'를 해보았는데, 아역을 지나 성인 연기자로 발돋움한 이후부터는 줄곧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더군요. <브루클린>에서는 미국에 정착해 살아가는 아일랜드 여성을, <암모나이트>에서는 레즈비언을 연기하는 등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요.

특히, <작은 아씨들>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감독에게 달려가, "'조'는 내가 한다. 나에게 적합한 역이 '조'라는 걸 난 이미 알고 있다.”고 당당히 말했다고 해요. 이렇게 보니, 저의 '인생 캐릭터'를 모두 한 배우가 연기한 게 마냥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연기에 녹여낸 가치관이, 같은 주파수를 가진 저에게 짜르르 하고 와닿은 것이겠죠. 좋여소 구독자분들 중에도 분명 시얼샤 로넌이 연기하는 캐릭터를 보고 필이 짜르르 오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시얼샤 로넌을 좋은 (여자)사람으로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