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최윤 엄마로, 누군가는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 엄마로 기억하고 있을 텐데요. 저 역시 날카로운 인상의 시어머니나 나쁜 엄마 정도의 배역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 <파과>의 ‘조각’ 역으로 이혜영 배우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어요.

영화 <파과>는 스물 네번째 좋은 (여자) 사람으로 소개했던 구병모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예요. 극 중 ‘조각’은 60대 여성 킬러로, 업계에서 ‘레전드’라 불리는 인물이에요. 한창 체력과 배짱이 좋은 30대 남성 킬러 ‘투우’와 겨뤄도 막상막하의 대결이 펼쳐질 정도죠. 이렇게 멋있는 60대 여성 캐릭터라니! 원작 소설도, 동명의 뮤지컬도 다 챙겨 본 저의 입장에서, 이혜영 배우는 정말 찰떡 캐스팅이었어요.

매서운 눈빛,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중저음의 보이스톤에 영화를 보는 내내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동시에, ‘이걸 어떻게 찍었지?’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영화 내내 이혜영은 칼을 유려하게 휘두르고, 줄 하나에 매달려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차에 치이고, 흙 밭을 뒹굴었어요. 스크린 너머의 촬영 현장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들이었죠. 60대 여자 배우로써 이렇게 험난하고도 멋진 배역에 도전했다는 점, 심지어 배역을 너무 잘 살렸다는 점에 감탄이 절로 나왔어요.

영화를 보고 나서 뒤늦게 이혜영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다시 찾아보았는데요.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한 배역에 도전해왔더라고요. 드라마 <무법 변호사>에서는 모두의 찬사를 받는 부장판사 ‘차문숙’을, 여성 3인 주연 드라마 <킬힐>에서는 홈쇼핑계의 커리어 하이를 찍은 전설적 인물 ‘모란’을 연기하기도 했어요. 또, 바로 오늘 막을 내리는 연극 <헤다 가블러>에서도 이야기의 핵심을 끌고 나가는 원톱 주연 ‘헤다 테스만’을 맡았죠.

저 혼자만 몰랐을 뿐,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 배역이 아닌, 여성 직업인 역할을 꾸준히 맡아왔더라고요. 사실 앞서 얘기했던 작품들에서도 단순히 엄마나 시어머니 역할은 아니었어요.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는 우아한 여배우 ‘오들희’였고, <꽃보다 남자>에서는 냉철한 경영인 ‘강희수’였죠.

60대에 어떤 여성이 되고 싶은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을 때마다 이혜영 배우의 근황을 찾아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왠지, 늘 예상보다 훨씬 더 멋있는 모습으로 앞서 나가고 있을 것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