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에 부합하는 것들은 선택의 순간에서 종종 기회비용을 낳습니다. 현실적으로 매순간 신념을 좇으며 살기 어려운 이유죠. 치킨 너겟을 예로 들어볼까요? 일반 치킨 너겟이 아닌 동물 복지 치킨 너겟을 장바구니에 넣으면 그 날의 장보기 예산이 달라집니다. 본품부터 포장재까지 전부 친환경 소재인 소비재를 구매하려면 열심히 발품을 팔아 내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또, 애정하던 브랜드가 반페미니즘적 행보를 보이면 대체할 브랜드를 찾기 위해 수고로움도 감내해야 하죠.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때때로 이 기회비용들은 슬쩍 바짓가랑이를 잡습니다. "그게 정말 중요해?"하는 의구심 어린 목소리와 함께 말이죠. 그래도 이 한번의 선택이 생계를 크게 좌지우지할 정도는 전혀 아니라서, 아직까진 신념을 잘 지켜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소신껏 고른 내 선택'이 생계와 앞으로의 미래를 좌지우지 한다면, 그때도 신념을 지킬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의 의견도 궁금해집니다. (딱 3초만 생각해보시죠.)

배우 이주영을 좋아하는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지점입니다. 배우에게 필모그래피는 생계, 커리어 등 직업 본연의 것들과 직결되는 영역이죠. 신념 하나만으로 작품을 선택하기엔 고민해야 할 요소가 무수히 많습니다. 인기에 비례하여 수입이 올라가는 직업의 특성상, 대중의 입맛과 성공 등 다른 선택지에 훨씬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죠. 그럼에도 이주영 배우는 착실히 본인의 신념을 지키며 작품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독립영화 <어떤 알고리즘(2017)>에서는 동성애자 역할을, <꿈의 제인(2017)>에서는 가출 청소년 집단의 성매매 피해자 역할을 맡았습니다. 대중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인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2020)>에서는 트랜스젠더 여성을 연기했죠. 그가 여성인권 및 소수자인권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필모그래피를 대충만 훑어도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태원 클라쓰>로 소위 '빵' 뜨며 차기작에 이목이 쏠리던 중, 그는 의외의 작품을 들고 나타납니다. 그게 바로 영화 <야구소녀(2020)>죠. 주인공 '주수인'은 고교야구부 내 유일한 여자 투수로, '여자는 프로 야구 시장에 못 간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여성입니다. "전 해보지도 않고 포기 안 해요."라는 명대사로 극장 내 (저를 포함한) 많은 여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죠.

독립영화판의 아이돌로 불렸지만 대중적 인지도는 부족했던 그 당시, <이태원 클라쓰>의 흥행을 보며 많은 영화 팬들은 '드디어 이주영이 메인 스트림에 진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는 독립영화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예감에 슬퍼하면서도, 더 많은 상업영화에 등장해 성공을 거머쥐기를 바랐죠. 

누가 봐도 배우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한 시기에 여성의 성장과 연대를 다룬 영화를 차기작으로 고르다니. 그의 선택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시에, 앞으로의 필모그래피를 더더욱 기대하게 되었죠. 가장 최근 작품인 <브로커(2022)>에서 이 대사를 말하는 이주영 배우를 보며, 앞으로도 그는 신념을 좇아 작품을 선택하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여성청소년과라면 형사과보다는 

좀 더 강 위쪽에서 

그물을 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가 버려지기 전에

엄마부터 먼저 구했어야

맞는 거 아니에요?"

이번 주말, 늘어지게 영화를 볼 계획이라면 이주영 배우의 '필모깨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숨쉬기 운동을 제일 열심히 하고, 가끔 걷기로 생색을 내는 수준이 됐지만 이런 저에게도 선수(?) 시절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대회에 나가면 평일에 학교를 빠질 수 있다는 선생님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어영부영 육상부에 가입, 오래달리기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었죠.

그런데 첫 연습 때 1,500m를 절반쯤 뛰고 나니 헛구역질이 격하게 올라오며, 어린 나이에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유유자적 한자리에서 공을 던지는 6학년 언니가 눈에 띄었고, 본능적으로 ‘저거다’ 싶어 환승한 종목이 바로 투포환이었습니다. (조금 갑작스러우시죠?)

그렇게 육상부에 가입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오래달리기는 헛구역질이 나 못할 것 같아 투포환을 하기로 했다고 말씀 드리자 부모님이 하신 첫마디가 아직 기억납니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가

투포환은 좀 그렇지 않니?
오래달리기는 다이어트에도 도움 되고,

몸매도 예뻐진다는데... 

그러지말고, 오래달리기를

조금 더 연습해 보면 어때?”

사실 저는 그 말을 듣기 전까지 ‘과연 나는 그 무거운 투포환 공을 어디까지 던질 수 있을까?’ 내심 설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말을 듣고 나니 거짓말처럼 ‘그런가..? 역시 여자애가 하기에는 좀 과격한가...?’라는 생각이 들더니, ‘역시 좀 그래..’로 자리를 잡더라고요. 그렇게 자신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마음으로 한 연습이 효과가 있을 리 만무했고, 희미한 대회 성적과 함께 저의 짧은 선수 시절도 끝이 났습니다.  

야구소녀의 주수인(이주영 분)은 최고 구속 134km, 볼 회전력의 강점으로 ‘천재 야구소녀’라는 별명을 얻으며 주목받았던 고교 야구선수입니다. 수인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고교 졸업 후 프로팀에 입단해 계속해서 야구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도 기회도 잡지 못합니다. 그 와중에 엄마부터 친구, 감독까지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이들 역시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하죠. ‘여자 치고 그만하면 됐어’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무엇이 다 됐다고 한 것일까요. 그녀의 재능이? 노력이? 둘 다 아니었을 겁니다.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수인이가 ‘야구선수’라는 이름으로 살아도 괜찮은 날들의 기한이었죠.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기운 빠지는 말들에 수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건 누가 정하는 건데요?”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절 울렸던 건 다른 장면이었지만 나중에 다시 보았을 때는 절 울린 건, 특별할 것 없는 저 말이었습니다. 그러게요. 내가 뭘 하면 좋고, 안 좋고, 맞고, 틀리고, 당연히 그런 줄 알았던 그 많은 일들은 누가 정한 거였을까요? 그리고 저는 왜 그게 당연한 줄 알았을까요. 

물론, 지금은 압니다. 제가 투포환을 계속하지 않은 이유는 수인이가 야구를 좋아하는 만큼 그걸 좋아하지도 않았고, 특출난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라는 걸요. 하지만 한 편으로는 좋아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뺏긴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생각합니다. 꼭, 그 정도로 좋아해야만, 그 정도로 잘해야만 할 수 있는 무언가는 따로 있는걸까요? 

그래서 저는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한계를 정하는 말을 얹기보다 세상의 많은 수인이들을 응원하는 쪽에 서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기운 빠지는 말들은 제가 아니어도 얹을 사람들이 많지만, 응원하는 사람은 한 줌도 안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외칩니다. 

“주수인 화이팅!!!!!!!”

* <야구소녀>는 왓챠, 티빙, 쿠팡플레이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